정성창 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장

에디슨 연구는 오늘날 혁신의 비밀을 푸는 방법으로 많은 학자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2천여 건의 미국과 해외 특허를 활용해 170개 기업을 설립했다. 이들 170개 기업에 지역 단위의 회사까지 포함하면 수백 개에 이른다. 그에 관한 서적과 논문이 2016년 기준으로 380여 편에 이르는데도 매년 새로운 책과 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에디슨은 발명가, 특허전략가, 화학자, 전기엔지니어, 기업가 등 다면성을 가진 혁신가이다. 이러한 에디슨의 모습 중 최근 다시 조명되고 있는 것은 기업가적 면모이다. 본 연재는 에디슨의 기업가적 면모에 중점을 두고 ▲1부. 발명의 황금시대(혁신의 토양) ▲2부. 기업가 선언 ▲3부. 벤처 기업 매각 ▲4부. 비즈니스 스승 ▲5부. 인생 최고의 거래 ▲6부. 사업의 대전환 등 순서로 그가 거대한 ‘전기(電氣) 프로젝트’에 도전하기 이전까지의 과정을 살펴본다. <편집자>

에디슨은 미국인들에게 발명가를 넘어 혁신의 아이콘이며 문화이다. 사진 왼쪽부터 타임 표지(2010년 6월), 내셔널 지오그라피 표지(2015년 3월 10일), 미국 전기전자공학회(IEEE-USA) 출판 서적 표지(2017년 9월 29일 서적 표지, 미국 최고의 유명작가 에드문드 모리스의 ‘에디슨’(2019. 10. 23) 표지

단돈 ’40달러’와 뉴욕행 편도 ‘티켓 한장’

해가 바뀌고 1870년 봄이 와도 에디슨의 발명에 투자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초기 투자가인 웰치는 에디슨의 ‘전기자기 인쇄기’에 대한 투자를 거부했다.

전기자기 인쇄기는 전신기의 배터리 관리를 간편하게 해주는 기계였다. 웨스턴 유니온(Western Union, WU) 은 에디슨의 이중 전신기 개발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의 전신 선로 가설 장면 : 전신 수요가 증가하면 WU와 같은 기업은 선로를 확장하거나 기술혁신을 통해 선로당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에디슨은 전신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중 전신기’가 큰돈이 될 것으로 보았다. 에디슨은 웨스턴 유니온(WU) 경쟁사인 아틀랜틱 앤 퍼시픽(Atlantic &Pacific Telegraph Company, A&PT)과 접촉해 실험을 위한 선로 사용 허가를 받았다. A&TP는 WU와 경쟁자이기는 했지만, 규모가 작았다.

에디슨은 A&TP가 있는 뉴욕의 로체스터로 향했다. 주머니에는 단돈 40달러가 전부인 채 4월 10일 로체스터에 도착했다.

4일이 지나서야 그는 A&P의 뉴욕 선로에서 자신의 이중 전신기를 실험했다. 640 km 길이의 전신 선로상태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에디슨이 만든 기계는 너무 복잡해서 작업자들은 기계 조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이중 전신기 실험은 실패했다. 에디슨은 실험이 실패 직후 잠시 보스턴으로 돌아와서 채무 관계를 정리했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것은 뉴욕으로 가는 배편 편도 한 장이었다.

로즈 사장과 운명적 만남.. 금 시세 표시기

에디슨은 뉴욕에 도착했으나 머무를 곳이 없었다. 밤새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가 가진 것은 커피 한잔할 돈뿐이었다.

에디슨

뉴욕 도착 이후 삼 일째 되는 날, 에디슨은 브로드웨이(Broadway)에 있는 G&SR 앞에서 멈추었다. G&SR의 로즈 사장과 직원들은 금 시세를 알려 주는 전신기가 고장이 나서 모두 당황하고 있었다.

에디슨은 로즈 사장에게 그 기계의 두 기어 사이에 부러진 스프링이 끼어 있다고 말했다. 로즈 사장은 에디슨에게 ‘고치게, 빨리, 당장 고쳐’ 소리쳤다. 에디슨은 두 시간 만에 그 기계를 말끔히 수리했다.

로즈 사장은 에디슨에게 감사를 표시하고 즉석에서 월급 100달러로 에디슨을 고용했다. 이 월급은 그에게 노숙을 면하고 따뜻한 음식을 먹도록 해 주었다. 에디슨은 미친 듯이 일을 해서 금 시세 표시기를 개량했다.그러나 특허를 받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에디슨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죽기 전에 행운이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8월 초가 되자, 로즈 사장은 에디슨을 그 회사의 운영 장비 전체를 관리하는 총 책임자로 승진시키고 월급을 3배로 올려 주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로즈 사장은 G&SR을 G&S에 매각하였고 G&S의 새로운 사장은 에디슨을 해고했다.

전신기 발명 3인방이 뭉치다…컨설팅 기업 창업

에디슨은 뉴욕에서 전기투표기, 이중 전신기, 주식 시세기 표시기 등 4건의 특허소유자였다. 그리고 몇 편의 논문 저자로 꽤 알려져 있었다.

‘폽, 에디슨’은 세계 최초의 기술 컨설팅 기업 중 하나이다.

한편, G&SR에서 에디슨의 직전 전임자였든 프랭클린 폽(Franklin Pope)이 새로운 저서 ‘전신의 현대적 실무(Modern Practice of Electric Telegraph)’를 출판했다. 이 책은 한 섹션을 할애하여 에디슨의 발명을 소개하고 칭찬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장점을 알아보고 1869년 10월 말 ‘폽과 에디슨’ (Pope, Edison & Company)’을 설립했다. ‘텔레그라프’의 애쉴리도 세 번째 파트너로 참가했다. 사업 범위는 ‘전신 기계의 설계와 운용’, 전신 회선의 건설과 보수‘, ’전신 특허의 신청과 대리‘ 등이었다.

폽은 경영을 맡았고 에디슨은 기계제작을 맡았다. 애쉴리는 회사의 보이지 않는 협력자로 홍보를 맡았다. 사무실은 브로드웨이의 시내에 두었다.

이 회사는 미국에서 최초의 기술 컨설팅 기업으로 평가된다. 뉴욕에 거처가 없는 에디슨은 뉴저지(New Jersey)의 엘리자베스(Elizabeth)에 있는 폽의 집에서 하숙하고 그에게서 생활비를 빌렸다.

동업 관계를 청산하다…기업 매각

에디슨은 주식 인쇄기 발명에 매진해 폽과 3개의 특허를 공동으로 확보했다. 두 사람은 이후 ‘금융과 상업 전신 회사’와 ’미국 인쇄 전신 회사’를 연속하여 창업했다. 이들 두 회사는 각각 금융 시세 정보서비스와 주식 인쇄기 제조를 맡았다.

‘폽과 에디슨’이 성장하자 ‘G&S’는 주식 인쇄기 특허권을 15,000달러에 사들였다. 에디슨은 자기 몫으로 5,000달러를 받았다. 에디슨에게 5,000달러는 지금까지 가져보지 못한 거금이었다.

에디슨은 포트 휴런의 부친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의 영혼을 만들어 준 어머니 낸시 여사는 치매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어떤 어려운 일도 하지 마세요. 어머니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해 주세요. 돈이 필요하면 저에게 말하세요. 얼마가 필요한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보내드리겠습니다.” – 토마스 –

그러나 에디슨은 분배 비율에 대해서 흔쾌한 마음은 아니었다. 폽이 공동발명자였지만 그의 공로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애쉴리는 발명자도 아닌데 15,000달러의 3분의 1을 받았다. 애쉴리는 매우 행복했지만, 에디슨은 불편했다.

결국, 에디슨은 동업 관계를 청산했다. 폽과 애쉴리는 이후 에디슨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텔레그라프’의 편집장이었던 애쉴리는 몇 년 동안 자신의 잡지에서 에디슨의 이름을 다루지 않았다.

애쉴리가 에디슨을 언급하기 시작했을 때는 혹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에디슨을 ‘이중인격자’, ‘다중인격자’, ‘남의 발명을 가로채는 파렴치한 자’로 묘사했다. 폽은 ‘굶주리고 오갈 곳 없을 때 도움을 주었는데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이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정성창 ipnomics@hanmail.net

정성창 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장은?

정성창 소장은 대전에서 지식재산과 혁신생태계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혁신생태계 전문 칼럼을 쓰고 있다. 연구소는 기업 혁신전략, 지역 생태계, 산업혁명과 기술혁신, 제도와 기업가, 특허제도의 경제사 등에 관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의 신산업과 지식정보혁명’(2001, 공저), 지식재산 전쟁(삼성경제연구소, 2005, 단독), 기업 간 추격의 경제학(2008, 공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