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화학이 SK이노베이션과 벌이는 전기차용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소송전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14일(현지시간)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2차전지 영업비밀 침해’ 소송과 관련해 SK이노베이션에 ‘조기패소 판결(Default Judgment)’을 내렸다.

이에 따라 당초 3월 초로 예정된 ‘변론(Hearing)’ 등의 절차 없이 바로 10월 5일까지 ITC위원회의 ‘최종결정(Final Determination)’만 남게 됐다.

소송

일반적으로 원고가 제기한 조기 패소 판결(default judgment) 요청이 받아들여지면, ‘예비결정(Initial Determination)’ 단계까지 진행될 것 없이 피고에게 패소 판결이 내려지게 된다.

ITC가 최종결정을 내리면 LG화학의 2차전지 관련 영업비밀을 침해한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셀과 모듈, 팩, 관련 부품·소재에 대한 미국 내 수입 금지 효력이 발생한다.

※ 영업비밀: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 않고 독립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합리적인 노력에 의해 비밀로 유지된 생산방법, 판매방법, 그 밖에 영업 활동에 유용한 기술상 또는 경영상의 정보를 뜻한다. 국내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에는 ▲영업비밀 침해에 대한 금지·예방청구권 ▲손해배상청구권 ▲영업비밀이 담긴 노트, 연구노트 등 영업비밀의 침해행위를 조성한 물건에 대한 폐기청구권 ▲신용회복청구권 등을 인정하고 있으며, 침해자 및 배후의 법인 등에 대한 형사처벌까지도 규정하고 있다.

영업비밀 성립요건

LG화학측은 “이번 판결은 ITC가 소송 전후 과정에서 SK이노베이션에 의한 악의적이고 광범위한 증거 훼손과 포렌식 명령 위반을 포함한 법정모독 행위 등에 대해 법적 제재를 내린 것”이라며 “추가적인 사실 심리나 증거조사를 하지 않고 LG화학의 주장을 인정해 ‘예비결정’을 내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기패소 판결 이끌어낸… LG화학

LG화학은 지난해 11월 5일 ITC에 SK이노베이션이 증거를 인멸했다며 조기패소 판결을 요청한 바 있다.

LG화학이 ITC에 제출한 법적 제재 요청문서

LG화학은 디스커버리(증거개시) 등 소송 전후 과정에서 SK이노베이션이 증거보존 의무를 무시하고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증거를 인멸했고, 이 정황에 따라 ITC가 명령한 포렌식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 미국 ITC 증거개시(Discovery) 절차: 미국 ITC에는 증거개시 절차가 있어 상대방에게 자료를 요청하고 적극적으로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 이 절차에서는 증거 보존이 가장 중요해 소송을 당했거나 소송을 당할 것으로 합리적으로 예측 가능한 경우, 당사자는 증거로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변경하거나 파기되지 않게 적극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는 ‘증거보존’ 의무가 부과된다.

SK이노베이션이 ▲지난해 4월 29일 LG화학이 영업비밀침해 소송을 제기한 바로 다음날 이메일을 통해 이번 소송의 증거가 될 만한 관련 자료의 삭제를 지시하고 ▲이에 앞서 지난해 4월 8일 LG화학이 내용증명 경고공문을 보낸 직후 3만 4천개 파일 및 메일에 대한 증거인멸 정황도 발각됐다는 설명이다.

영업비밀 침해 소송 관련 증거 인멸 시도 메일 (발췌: SK이노베이션의 ‘19 년 4/30 사내 메일 . LG화학의 ITC 소송제기일 4/29, SKBA: SK이노베이션의 전지사업 미국법인)

또한 ITC의 명령에도 불구 ▲포렌식을 해야 할 75개 엑셀시트 중 1개에 대해서만 진행하고 ▲나머지 74개 엑셀시트는 은밀히 자체 포렌식을 진행한 정황 등 법정 모독행위도 드러났다고 주장했다.

※ 포렌식: 컴퓨터 서버를 포함해 디지털 기록 매체에서 삭제된 정보를 복구하는 등 남겨진 정보를 수집, 분석하여 특정 행위의 사실 관계를 법적으로 규명하고 증명하기 위한 절차

ITC의 불공정수입조사국(OUII)은 같은 달 15일 LG화학의 조기패소 판결 요청에 찬성하는 취지의 의견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OUII는 의견서에서 “SK이노베이션이 증거를 훼손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며 ITC의 포렌식 명령을 준수하지 않았다”며 “이런 행위들 중 일부는 고의성이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OUII는 조기패소 판결 요청을 수용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의견과 함께 “다만 SK이노베이션 측이 쟁점에 대해 설명할 기회가 있어야 하므로 청문회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조기패소판결’ 캡쳐 화면 출처: ITC홈페이지

LG화학은 “조기패소 판결이 내려질 정도로 공정한 소송을 방해한 SK이노베이션의 행위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SK이노베이션에 대한 법적 제재로 당사의 주장이 그대로 인정된 만큼 남아있는 소송절차에 끝까지 적극적이고 성실하게 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LG화학 전기차용 배터리: LG화학은 오랫동안 축적해온 공정기술을 바탕으로 배터리 업계 최초로 파우치형 배터리 ‘롱셀(Long Cell)’ 기술을 개발해 자동차업체에 공급하고 있다.

2차전지 핵심기술 등 영업비밀을 둘러싼… 소송전 

지난해 4월, LG화학은 미국 ITC에 2차전지 관련 영업비밀을 침해한 SK이노베이션의 셀,팩, 샘플 등의 미국 내 수입 전면 금지를 요청하는 한편, SK이노베이션의 전지사업 미국 법인(SK Battery America) 소재지인 델라웨어 연방지방법원에 영업비밀침해금지 및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을 제기한 이유에 대해, LG화학측은 SK이노베이션이 전지사업을 집중 육성하겠다고 밝힌 ’17년을 기점으로 2차전지 관련 핵심기술이 다량 유출된 구체적인 자료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또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한 것은 미국 ITC 및 연방법원이 소송과정에 강력한 ‘증거개시(Discovery) 절차’를 두어 증거 은폐가 어렵고, 이를 위반 시 소송결과에도 큰 영향을 주는 제재로 이어지기 때문으로 설명했다.

*증거개시절차: 미국소송의 당사자는 보유하고 있는 소송과 관련된 각종 정보 및 자료에 대해 상대방이 요구할 경우 제출할 법적 의무가 있으며, 이를 통하여 소송 대리인들은 상대방의 증거자료에 접근이 가능함

소송을 제기한 배경에 대해 LG화학 관계자는 “현재 세계 최고 수준인 LG화학의 2차전지 사업은 1990년대 초반부터 30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과감한 투자와 집념으로 이뤄낸 결실”이라며 “이번 소송은 경쟁사의 부당 행위에 엄정하게 대처해 오랜 연구와 막대한 투자로 확보한 핵심기술과 지식재산권 보호를 위해 불가피한 조치이고, 정당한 경쟁을 통한 건전한 산업 생태계 발전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주상돈    newsdjoo@gmail.com